기획 의도

선(線) 위에 선(立)
장기수 붓글씨 전시회를 열며 ─

장기수와 인권운동 

1990년대 내내 장기수 석방은 인권운동의 주요 이슈였다. 장기수들은 단지 오래 감옥에 갇혀 살았던 것만은 아니다. 체포되고 재판을 받고 형이 확정되기까지 그들은 법의 이름으로 인권을 유린당했다. 일상화된 고문과 강제전향까지 장기수들이 온몸으로 견디어 낸 야만의 시간에 대해 인권운동은 국가범죄의 책임을 물었다.

레드 콤플렉스에 찌든 세상에서 ‘간첩의 인권’을 말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먼저 ‘만들어진 간첩’의 실상을 드러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 집중적으로 벌어진 간첩 사건들은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의 안정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밀실에서 수십 일씩 고문을 당한 뒤 만들어진 간첩 사건들은 이제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있다. 

인권운동은 조작간첩에 이어 강제전향의 반인권성에 주목했다. 그런 노력으로 세계 최장기 장기수 김선명 씨가 45년만인 1995년 8월 풀려났다. 이후 비전향장기수들이 계속 석방되어 1999년 2월에 강용주 씨를 마지막으로 모든 장기수가 석방되었다. 

장기수와 붓글씨

고문폭력이 횡행하던 0.75평 독방에서 일부 장기수들은 서예를 배울 수 있었다. 장기수들은 그 붓에 한과 분노와 아픔을 담아냈다. '百鍊綱(백련강)', 아마도 장기수들이 붓으로 가장 많이 써 내려갔던 글귀일 것이다. 백 번을 두들겨 맞아 더욱더 단단해지는 쇠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벼려갔다. 

옥중에서 썼던 작품들이 지인들의 면회와 석방과정에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빨갱이’ 낙인이 찍힌 장기수들에게 세상은 더 큰 감옥일 뿐이었다. 바깥세상에서도 감옥에서 배운 붓을 들었다. 오늘 이곳에 전시되는 작품 중에서 옥중작도 있고, 세상에 돌아온 뒤에 썼던 작품도 있다. 20여 년 전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모았던 작품들이다. 

장기수는 단지 오랜 기간 수감된 사람들이 아니다. 분단 폭력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던 이들이다. 입에도 올리지 못했던 삭제된 존재였던 ‘빨갱이’ 장기수들, 세상은 다시 그들을 잊었다. 온 국민을 들뜨게 했던 4.27 판문점 선언 1주년을 앞둔 지금, 감옥 안팎에서 분단의 선이 만들어낸 지독한 폭력을 견디며 붓을 들었던 장기수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붓이 그려낸 선 위에서 경계인으로 살아온 장기수들의 고통과 아픔에 귀 기울일 때 분단의 선이 아닌 서로를 연결하는 새로운 선이 만들어질 것이다.